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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
조원재 지음
삶이 텅 빈 것만 같을 때, 오직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반복되는 삶에 지쳤는가
매일 똑같은 반복은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의 삶은 매일 반복된다.
과연 지구상에 사는 사람 중 매일 전혀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학생, 직장인, 예술가, 사업가, 공무원, 운동선수, 연예인등등.......
누가 반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백수는 그럴 수 있을까? 딱히 할 일이 없는 일상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삶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쥐여준 반복의 숙명을 벗어나기 힘들다.
삶은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일까 우리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관성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어떤일을 처음 경험할 당시에는 분명 아주 새롭고 너무 소중하고 정말 감사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하루, 이틀, 한달, 1년, 3년, 10년이 반복되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처음 느꼈던 새롭고, 소중하고, 감사했던 그 모든 감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무감각 해져서 그 어떤 것도 음미 할 수 없게 된다.
분명 내 삶속에, 내 곁에 있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가 보고 있는것도, 만나고 있는것도, 하고 있는 행위도, 하고있는 일도 모두 다, 그렇게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것에 흥미를 잃고 시들어 간다.
일기 일회(一期 一會)라는 말이 있다. 평생에 이뤄지는 단 한번의 만남 단 한 번인 일, 이 일은 차마시는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다도(茶道)에서 쓰인다. 어제도 차를 마셨고 엊그제 역시 차를 마셨지만 차를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평생에 한번 일어나는 일임을 가슴에 새겨 차 한 모금을 아주 새롭게 음미 한다는 마음의 자세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한 인간이 지닌 지성의 문제를 누군가가 가르쳐준다고 알려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이 내면에 지닌 지성으로 해내는 일이다. 우리의 일상이, 삶이 아무리 매일 반복되더라도 매 순간은 진실로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지성을 발휘해 그 진실을 매일 매 순간 의식하려 노력한다면, 무미건조하게 여기던 것들이 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전혀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색과 형과 향을 지닌 꽃이 피어날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예술이 피어날지 모른다.
삶이라는 백지 위에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삶은 단 한장의 백지를 던지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엇을 그릴거냐고, 삶이 던진 그 백지 앞에 우리는 붓이된다. 태어나 삶이 진행되고 있는이상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삶이라는 백지위에 무엇을 그릴지를 삶이 예술이라면 우선 떠오르는 대로 칠하거나 닥치는 대로 그리는 것은 올바른 순서가 아니다. 더욱이 삶에는 시간이라는 변수가 있다. 그림은 틀리면 고칠수 있지만, 삶은 그럴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단 한 번뿐'이라는 일회성이 있기에 졸작이라고 쉽게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이 예술이라 생각한다면 지극히 작은 부분을 어떻게 그릴지 골목하기전에 바로 옆에 어떤 색을 칠할지 집착하기전에, 일단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자.
봄바람 처럼 선선한 마음으로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단 한 장의 백지' 전체를 조망해 보는 시간을 마련하자. 이제껏 당신이 겪어온 모든 것을 곰곰이 살펴보면, 그렇게 당신의 내면을 깨워 섬세히 어루만지며 당신만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지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런 시간을 '창조' 해 보자.
구성의 시간, 우리의 오직 단, 한번 뿐인 삶을 위한 시간, 전체를 조망해 보았을때 우리 삶은 어떤 독창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을까? 그것은 얼마나 나 다운 것인까?
당신은 돌덩이인가, 조각인가
우리가 예술을 즐기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결국 인간과 삶, 그리고 세계를 조금 더 깊고 넓고 다채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 반면 예술가는 삶을 살며 자신이 이해한 인간, 삶, 세계에 대한 통찰을 작품에 자기만의 표현 방식으로 응축해 담아내려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온몸으로 미술작품을 감각하고, 소설과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와 연극을 본다.
이렇게 예술을 즐길 때, 비로소 우리는 유한한 삶 속에서 미처 모두 경험해 볼 수 없는, 생각하고 느껴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낄 기회를 창조해 낼 수 있다.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경험의 양과 질을 대폭 확장시킬 수 있다.
생각의 폭과 느낌의 깊이 역시 무한히 팽창시킬 수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지식을 넘어 지혜를 얻게 된다. 단순히 뭔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나날이 성숙해지는 인간으로서 삶을 건강히 영위해 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은 우리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선물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의 삶에 예술이 공부의 대상이 안닌 지혜의 샘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당신의 삶에 맑고 깨끗한 물이 끝없이 샘솟기를 바란다. 이 물을 마신 당신의 삶이 예술이 라는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자신의 민낯을 마주한 적 있는가
나의 소중한 친구는 가끔 자신이 쓴 일기 내용을 자기만의 비밀 보물상자에서 보석 하나를 수줍게 꺼내 보여주듯 들려준다. 그 친구가 내게 나직나직 들려주는 일기의 내용은 뭘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매우 특별하다. 그 어떤 유명인, 위인, 권위자에게도 듣지 못했던 생각, 감정, 영감, 깨달음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는 그 친구만의, 그 친구다운 내면의 미가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게다가 꾸밈없는 진실의 최전선에 가 있는 영롱한 이야기다. 그 일기는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진솔한 대화를 위해 마련된 그만이 알고 가꿔가는 초록 내음 넘치는 싱그러운 숲이다. 나는 안다. 삶의 대부분을 함께해 온 일기 작업이 그 친구를 성숙하게 하고, 고유한 지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한 단단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하는 모든일이 처음에는 허접하기 마련이다. 나의 요리처럼 말이다. 이것이 예술과 삶이 통하는 지점이며, 삶의 모든 행위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처음부터 완벽해야만 한다는,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인간을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족쇄가 된다. 모든 일의 시작은 당연히 허접하다.
실수와 시행 착오가 숱하게 이어진다. 거기서 배우고 깨달음과 영감을 얻는다. 다음 차례에 그것을 반영해 조금씩 개선해 나간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숙을 거듭해 가다 보면, 끝에 누가 봐도 비범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즉 예술이 허접했던 이에게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허접에서 비범으로 향하는 길, 그 길이 우리가 삶에서 예술을 행하는 길이 된다. 세잔이 그 길을 걸으며 예술을 일군 것처럼. 우리가 그 길을 걷기로 택한다면 우리는 예술가가 되고, 우리의 삶은 예술이 된다.
절대적으로 흔하고,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우리가 흔하다 여기기에 흔해 보이는 것이며, 평범하다 여기기에 평범해 보이는 것이며, 무의미하다 여기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것이라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멋어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세상과 사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자.
세상과 사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으로. 그 눈으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매우 희소하고 특별하고 의미 충만한 것으로 부활할 수 있다. 그것이 흔한 돌이 예술이 되는 비밀이며, 평범한 일상이 예술이 되는 비밀이며, 무의미한 삶이 예술이 되는 비밀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 평소 일상에서 감정 분출을 할 수 있는 때와 장소가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거의 없다시피 할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분출해 밖으로 표출하는 것은 먹고살기 위한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실례이며 불필요한 행동으로 여겨지기에.
우리는 감정을 숨기고, 심지어 그 감정을 분출할 수 없도록 마음속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아 뚜껑을 닫아버린다. 어찌 보면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행위가 하루 이틀 짧은 이벤트로 끝난다면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10년, 20년, 30년, 그렇게 평생 지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 살기위해 살기도 하지만, 먹고사는 것과 관계없이 표현하기 위해 살기도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채고,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분출하고 표현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가끔 어떤 표정 변화의 기색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다. 얼굴에 미소 하나, 찡그림 하나 보일 기미가 없다는 것. 마치 단단하게 고착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얼굴. 그런 얼굴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기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왔는지를 증면하는 것 같아 안타깝고 씁쓸해진다.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분출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
그로 인해 타인의 감정이 어떠한지 공감할 수 없게 되는것. 감정 분출과 표현이 퇴화한 자리에 차가운 이성만이 가득 차버린 모습.
일상에서 우연히, 불현듯 맞이하는 이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을 나는 세상이 삶에 선사하는 '예술의 순간' 이라고 여긴다. 오후 내 해수욕을 즐기고 나서 상쾌해진 몸을 모래 사장에 누이고 지는 해와 함께 어둑해져 가는 해변을 바라본 날이있다. 구름 한점 없이 잿빛이 되어가는 하늘과 검푸른 색으로 물드는 바다만 있는 수평 구조였다면 싱거웠을 공간. 그 공간 윈편 오묘한 지점에 새빨간 등댓불이 꿈뻑거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그 불빛은 바다 표면에 투영되어 해변 끝가지 기다랗게 치고 들어왔다 꺼지기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바다를 그렇게 바라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그 풍경에서 내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낀 것은 불현듯 찿아온 감정이었다. 그 여름이 지난 지 몇 달이 되었음에도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감상으로 남은 것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이 내게 선물해 준 예술의 순간이었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일상에 이런 예술의 순간은 우연히 찾아온다.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 시공간의 미는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말하고 싶다. 불현듯 찾아오는 예술의 순간을 창조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고.
세계 자체는 아무 의미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거기서 예술을 감지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그것을 감각하고 느끼는 이의 몫이다.
오래된 나무줄기 귀퉁이를 뚫고 나와 자라고 있는 어린나무를 보며 생명의 강인한 힘을 감각하고 느끼는 순간을 맞이하느냐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문제지 그 나무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책을 보고, 사색을 하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의 시공간에서 우연히 불현듯 나타날 예술의 순간을 고대한다. 도처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단 하나의 의미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누군가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우리잔에 맺힌 물방울이나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액화와 기화를 반복하며 생성과 소별을 무한히 반복하는 물방울의 존재성에서 모든 존재가 가진 생성과 소멸의 이치를 체감하며 가득 차오른 충일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에서 예술의 순간은 그렇게 우연히 불현듯 찾아온다. 항상 세상을 이롭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감각을 지니려고 노력하는 이에게.
예술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 이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오직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체험뿐이라고. 내가 하는 체험만이 지금과 내일의 나를 빚는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 예술을 창안해 낸 우리 인간의 삶 역시 정답이 없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예술이 무엇인지' 먼저 스스로 정의해야 하듯, 삶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삶이 무엇인지' 먼저 정의해야 한다. 당연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준다 한들 자신이 몸소 체험을 통해 깨닫지 않는 이상 삶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만의 '삶의 정의' 를 정립해야 한다. 오직 단 한번뿐인 삶을 탐험하는 마음으로 체험하고 감각하며, 그 속에서 숱한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영감을 얻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해 가며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찾아가야 한다.
예술가가 자기 나름의 '예술의 정의' 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하듯, 삶을 사는 우리도 자기 나름의 '삶의 정의' 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삶' 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예술과 하나가 된다. 인간은 삶과 다르지 않은 예술을 삶 속에서 낳았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할지라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나의 사적 정체성은 무었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 하는가? 내가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개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세계를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질문에 자기 나름의 솔직한 답을 찾아낸다면 분명 삶에서 예술을 하고 있으리라. 삶에서 자기 고유의 색채, 형태, 구성을 머금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고 있으리라.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이 사적 정체성을 뿌리 삼아 발현되고 있으리라.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한 차례 자발적 일탈을 감행했음에도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여전히 흐릿하다면, 두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그 후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불투명하다면, 세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화랑에서 일을 하다, 불쑥 기숙학교에서 선생을 하다, 불쑥 광산으로 간 빈센트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그 모든 불확실한 일탈의 감행이 모여 '건강한 방황' 으로 정의 되리라 믿는다. 그 일탈의 체험과 기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밝고 분명해지리라. 수많은 시도 끝에 점점 초점이 또렷해지는 피사체처럼.
미술가들 역시 처음에는 제도권의 미술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다. 즉, 과거의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미 축적되어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뛰어난 미술가는 그 교육을 모두 이수해 졸업장을 받았다고 모든 것이 성취되거나 완성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미술을 하기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기존의 미술을 섭렵하는 시간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이후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기존의 미술을 배운 이후 그것을 깨고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앞으로 창조해 나가야 할 '자신만의 예술' 은 지금껏 다른 누군가가 체계화해 온 예술에는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이미 남이 체계화해 놓은 것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진정한 예술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존재하고 있는 미지의 무언가를 발견해 외부 세계에 물질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독학을 수행한다...
피어나기
봉오리 여는일.
대신 해줄 수 없는 일.
힘껏 열어젖혀
피어나는 일.
오직 꽃,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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