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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

by 화담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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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를 읽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쇼페하우어 인생론 에세이'

책을 한 권 사려고 서점에 갔다가

'스테디 셀러' 이책을 보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부유하고 가정환경이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였다. 

유년시절 2년여의 여행은 쇼펜하우어에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하였다. 

아버지의 강력한 뜻에 따라서 사업가 견습생 2년여를 하다가 결국은 결심을 굳히고 

하고싶은 학문에 열중한다. 

쇼펜하우어의 생애와 사상

쇼펜하우어는 독일의 단치히에서 은행가인 아버지와 여류작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자술 소개서에도 나타났듯이 그는 평생 동안 돈 걱정없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시작하여 피히테, 셀링, 헤겔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들의 이론에 반기를 들었지만 근본 사상이나 체계는 독일 철학자들의 관념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나 인도의 베다 철학에 영향을 받은 탓으로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부정적 시각이 강해 소위 염세 사상이 그의 철학에 깊이 깔려 있다. 

그는 칸트처럼,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과 곤간의 범주,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되는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태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욕구로 고통이 계속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구가 없는 해탈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는 부정되고 눈에 보이는 형상세계는 무로 돌아가는 것, 즉 불교가 말하는 열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p17~19

 

1. 사랑은 없다.

그렇다면 성욕은 왜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가?

그 해답은 너무 간단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꽃을 찾기 때문이다. 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사랑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가장 엄숙한 것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 최대의 이슈이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모든 사랑의 목적은 그것이 비극이거나 희극이거나 인생의 여러 목적 중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대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목숨을 건 사람들의 위대성을 찬미하고 노래하고 기리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생존 의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바로 그 뒤에는 인류의 종족 유지라는, 신이 준 절대적인 사명감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살려는 의지는 두 사람 사이에 자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 설정된다. 그렇게 태어난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의지와 성격을 물려받고, 어머니로부터 지능을 계승하며 양쪽으로부터 체격을 이어 받지만 용모는 아버지를, 자태는 어머니를 닯게 된다. 

대부분 공감이 되지만,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서 많이 변하여

지금은 신이 준 절대적인 종족유지,

이 사명감이 많이 변화한것 같다는 생각이다. 

 

2. 행복이라는 그림자

시인이 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또 다른 어떤 불행한 사람이 똑같은 꽃을 보고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꽃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무관심한 사람은 그 꽃을 그저 무미건조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라는 외적 조건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마음의 눈으로 꽃을 그려내고 있다는 뜻이며 행복이나 불행 역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마다 아주 높은 단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도 서로 다르다.

그것은 정신 능력의 크기에 의 해 결정된다. 정신 능력이 작고 좁은 사람은 저급한 행복과 쾌락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 크기를 스스로 넓힐 수 있는 힘도 없다. 

그러나 아주 높은 단계의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정신 능력도 큰 법이다. 

행복 중에서도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이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입증된 공통적인 행복이 있다. 예를 들면 건강한  거지는 병든 황제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건강과 체질에서 나온 명석하고 침착한 성격, 괘할하고 민첩한 지능, 절도 있는 의지와 선량한 양심은 결코 어떤 지위나 재산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의 자산으로 입증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아무도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자기만의 것들이다. 정신력이 풍부한 사람은 아무리 고독한 곳에 가 있어도 스스로 충분히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지만, 정신력이 빈약한 사람은 아무리 사람들과 만나고 여행을 하고 세속적인 향락에 젖어도 권태의 긴 그림자를 스스로 떨쳐낼 수가 없다. 

착하고 절제있는 사람은 아무리 불행한 위치에 빠져도 만족을 느낄 수 있지만, 욕심과 시기가 많은 사람은 아무리 재물을 많이 갖고 있어도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른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정신능력의 크기는, 

정신력이 얼마나 풍부한가

내 만족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된다. 

3. 재산의 조건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자연론과 이기주의적 윤리학을 창설한 학자답게 인간의 욕구를 정밀하고 교묘하게 세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먹고 입는 욕구이다. 

이것은 자연적 욕구로써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된다. 

둘재는 성욕이다.

이 욕구 역시 자연적인 욕구이긴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없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부와 명예에 대한 욕구이다. 

이 욕구는 종류가 너무 많은 데다가 이것을 충족시키기는 대한히 어렵다. 이상이 인간이 가진 3대 욕구이다. 

막대한 유산을 가진 사람들 중 자선 사업에 뛰어든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돈벌이를 하지도 않으면서 돈을 고스란히 쌓아두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가난에 못 이겨 노동하는 사람보다 불행하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질 만능은 이제 오래된 이야기다.

주위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남의 불행을 이야기 하기전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4. 명예라는 이름의 독

인간의 명예욕은 항상 제3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으로 부터 칭찬이나 찬사를 받거나 모욕과 경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가 된다.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인간의 행복에는 해롭고 불리해진다. 그래서 지금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은 훨씬 행복하다. 

'남이 뭐라고 말할까?' 이런 생각을 늘 하는 사람은 이미 남의 시선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는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명예욕은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한다. 

명예욕이 아니더라도

체면이나 자존심등으로

이목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몇 사람만 모여도 그 중에서 

존재감이 충만하여 오버하고

좋은 평가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능력이겠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누가 누구를 

함부로 평가 할수 있을까. 

 

5. 인간은 본래 이기적 존재다. 

인간의 이기심처름 무서운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예의나 겸손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을 감추려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면의 껍질을 뚫고 나와서 남들과 어울릴 때마다 작동을 시작한다. 

이기심에서는 나보다 앞서는 우선 순위는 없다. 남의 입장은 그 다음 문제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며 남은 안중에도 없다. 

사람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까를

먼저 생각한다고 한다. 

기본은 그렇다고해도 사람마다 

이기심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세계가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하는것도 우리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다.

6. 종교는 신화다. 

우리가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와 불멸에 대한 관심 대문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입증된다면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곧 식어버릴 것이다. 

모든 기성 종교들은 철학이 차지하는 지위를 박탁하려고 애쓰지만 철학자는 종교를 필요악으로 인정 할 수박에 없다. 또한 철학자는 종교를 약하고 외로운 다수의 인간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정하지만, 종교가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는 항상 적대적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철학자가 아니면 종교의 병폐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7. 정치는 야성적으로 하라.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주장하고 도덕적 우월성과 인격을 내세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수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본능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인간의 잔인성은 야수의 잔인성보다 소름끼칠 만큼 위악적이다. 가령 전쟁이 터지거나 국가의 법 질서가 무너졌을 때 혹은 무정부 상태의 폭동이 돌발적으로 발생했을 떄를 보면 인간은 자신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노출시키고 있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고 지혜롭고 깨끗하고 도덕적인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가라는 큰 건물의 돌기둥을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자격없는 통치자의 통치는 짧을수록 좋고, 길수록 폐해는 더욱 커진다. 

국가의 목표는 끝없는 경제 성장이나 발전과 진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선진 국가라는 나라를 보면 안일과 나태보다, 많은 탐욕과 도덕적 붕괴를 통해서 더 큰 비극과 반인류적인 작태들이  성행하고 있고, 그것이 국민을 한 층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국가의 힘으로 혹은 인위적인 제도로 부정과 부패가 없어져서 천국 같은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그것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야수로 변하거나 아니면 전쟁으로 혹은 인구 증가나 기근으로 파멸을 자초하는 길을 가게 되어 있다. 

탁월한 통치자를 배출하려면 성품이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고귀한 남자와 지능이 뛰어난 여자의 결합보다 더 실질저인 해결책은 없다. 이 제안이 나의 유토피아,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위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야수보다 잔인한지는 

전쟁을 통해서 많이 느낀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존재 하는한 전쟁은 없을 수 

없는것 같다. 

 8. 고뇌는 인간의 벗

사람은 고뇌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고뇌 때문에 허덕이며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육체는 압력이 없어지면 파열된다. 그와 똑같이 인간의 정신도 고뇌라는 압력이 없어지면 파괴된다. 배가 항해 하려면 압력을 가하는 물체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도 육체나 정신에 고뇌라는 압력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생애의 초반이나 전반부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행복에 대한 큰 갈망과 희망과 포부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생애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사람이나 행복이나 야망이 한낱 망상의 산물에 불과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의 후반부에서도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생의 전반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강렬한 쾌락보다는 다만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며,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보아온 재난이나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극단의 갈증이 필요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병고는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늙었다는 것은 죽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극단의 구속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9. 절망과 허무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참으로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보이지 않고 혹시 보였다 해도 잠시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그 잠시 동안 머물렀던 행복은 미래 시점에서 보면 착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때닫게 된다. 따라서 행복의 배나 불행의 배나 귀항 할 때는 모두 부서진 배가 되어 돌아온다. 

사람은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리 야단법석을 피우며 살지만 결국은 식욕과 성욕의 만족이라는 두 종류의 간단한 원동력과 권태라는 동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이 세 가지 기능만으로 생존이라는 실로 화려한 드라마를 조작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 바이런은 삶의 허무를 착각에 비유 한 시를 썼다.

"드디어 그는 깨닫게 되리라.

비애의 노새가 손을 잡고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음을

그리고 오랜 괴로움을 겪어온 생애가

결론은 미궁에 빠져 있었음을"!

이 시는 나의 세계관과 일치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미궁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울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죽음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바로 나 지신이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삶을 돌아보고 

지난 세월을 떠올릴대 

웃 어른들은 어느덧 기억이 가물가물

어느덧 내가 그 자리에 와 있고 

아 인생은 허무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로 가는것인지 

모든 삶은 쉬지않고

흐르고

 ...

 

10. 죽음의 행복

대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그 안에서 수많은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 변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안간의 죽음에 대한 비극과 통곡도 대자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엄청난 동식물의 죽음과 파괴도 그것들이 결국은 자기 품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자연에게는 삶도 죽음도 모두 자기 것이다. 

생명이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이고 그것은 결국 대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진다.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 혹은 개미 한 마리도 죽음을 통해 모두 자연으로 되돌려진다. 그 죽음으로 유기질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도 그와 똑같다. 인간의 죽음이라고 해서 다른 유기체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제 결론을 정리하자면 우리들의 죽음은 대자연의 사이클의 이동일 뿐이고, 대자연이 인간의 죽음과 전혀 관심을 갖지 않듯이 우리 인간 역시 죽음에 대해 상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노후에는

욕심이나 집착을 내려놓고

그저 요지경 같은 세상을

지그시 바라볼 수있는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나이가 들어

아무런 질병없이 살다가

잠자다가 그냥 깨어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면 이보다

큰 복은 없을 것이다. 

11. 처세론

처세에 관해서 니코마쿠스 윤리학에 나오는 구절

"현명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현명한 사람은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쾌락을 원하지 않는다. "

젊음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인생은 매우 길게 보이지만 노년의 출구에서 바라보면 인생처럼 짧고 허망한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겪는 심한 착각 가운데 하나이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배들의 결론을 예의 주시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노년기의 지혜를 예견하고 운명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허망한 삶을 다 보낸 후에야 선각자의 말을 깨닫고 가슴을 친다. 우리는 쾌락대신 지혜를, 행복 대신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향락과 사치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결국 행복을 멀리하는 길이다. 따라서 이웃과의 교제를 즐기고 향락과 쾌락을 좇는 사람들은 고통과 고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향락과 쾌락에는 반드시 거짓과 위선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에 의해 상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교집단은 으레 우리들에게 타협과 양보를 강요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자신이 섞이거나 단체나 클럽이나 모임에 가면 개인은 무력해져야 하며 개성은 사라진다. 자신이 자기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고독할 때문이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도 혼자 있을 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만나기를 피하고 고독을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독은 뛰어난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에세이

11가지 목록으로 나뉘어져

처세론으로 마무리다.  

"반복은 학습의 어머니"

좋은 책을 만나면 

두번이상 읽으라고 한다.

두번 경험하면 다른 것과 

연관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놓친 부분을 살릴 있고

첫번과는 다른 생각과 기분을 

얻게 되면서 그 차체의 인상이 

다르다고 한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에 양식을 쌓는 책

인생론 에세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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